[김지혜의 Interview-e]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김영동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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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하늘나라에 가면 사자와 같이 뛰어놀고 독사의 입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경 이야기에 매료돼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마음 하나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마을 뒤편에 있던 재림교회 여름성경학교에 갔다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김영동 장로(공릉동교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어느덧 66년간 이어온 굳건한 신앙이다. 1947년, 유교문화를 중시하는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첫 월급을 받았을 때도 십일조와 각종 헌금부터 구별하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온 마음을 집중하고 순종했던 스토리는 재림성도들에게 가히 모본이 될 만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제목의 글은 시조사가 세 번째 개최한 ‘SIGNS AWARDS’의 ‘영혼의 양식’ 부문에서 당당히 대상으로 당선됐고 월간 <시조>에도 실리게 됐다.
1970년 2월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3월 1일부로 경북 영덕군 소재 낙평초등학교로 발령난 순간부터 그의 신앙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지 않고자 노력했던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귀히 보셨다.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마음을 기꺼이 받으시고 믿음의 생애를 살아오게 하신 하나님은 분명 ‘들으시고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교육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대학 수업료 면제, 병역 면제 특혜가 주어졌고 졸업 후에는 의무적으로 공립학교에서 5년간 근무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교사자격증을 반납하고 군대도 입대해야 했다. 설렘과 기대를 가득 품고 단 위에 섰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은 순종할 수가 없어 그의 믿음의 크기만큼이나 부담감과 슬픔도 컸다.
국어 시간에는 문학 영역의 위인전 이야기로 아브라함과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미술 시간에는 밖으로 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연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나무와 새, 꽃 등을 그려 보게 했다. 특활 시간에는 응급처치법, 끈매기법, 별자리 찾는 법 등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토요일 수업을 너무 좋아했다.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드러내는 선교 사명을 갖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오천 시냇가’ 옆에 마련한 숲속 작은 공간에서 혼자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서 하는 것과 같은 순서로, 사업장려와 선교지방소개를 읽으며 교과공부를 하면서 안식일학교 시간을 보냈다. 설교예배 시간에는 헌금을 드리고 찬양도 부르고 설교 대신 <교회지남>과 <시조> 등을 읽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것이 느껴졌고 눈물을 흐릴 때 그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럴수록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그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한 지 2년 반이 지날 무렵,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영덕에 유일하게 재림교회(예배소)가 있는 동네인 강구초등학교로 보내셨다. 더구나 강구교회 사택에 살 수 있는 특혜까지 누렸다.
“저녁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안식일이 되면 아내는 교회에 가고 나는 학교로 출근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또 길을 열어 주셨다”며 영남합회로부터 교사 제안을 받았다고 말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날부로 짐을 싸서 학교를 옮기고 싶었지만 5년을 채워야 전근할 수 있는 현실은 높다란 장벽 같았다.
그런데 당시 영남합회 교육부장이었던 김대식 목사가 교육청과 합의를 봤고, 얼마 후 대구삼육초등학교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함께 일하는 교사들은 왜 하필 그런 작은 학교로 가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구삼육초등학교는 전교생이 28명, 6학년 학생은 1명인 매우 작고 약한 학교였기 때문.
그러나 그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인근 교회 교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녀를 삼육학교에 보내라고 설득했다. 다음 해에는 30명이 늘어나 전교생이 두 배로 급증했다. 원하는 학교에서 일할 수 있게 됐지만 사단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는 그의 신앙생활을 격하게 반대했다. ‘내가 죽으면 밥 한 그릇 안 떠 놓을 녀석, 그럼 내가 조상의 얼굴을 어떻게 뵐 수 있냐’라는 이유였지만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교회로 인도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내가 죽어도 제사 지내지 말고 교회법에 따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김 장로에게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 보아 알’게 된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은퇴할 경우 주어지는 ‘국민훈장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하고 태강삼육초등학교에서도 ‘아름다운학교경영자상’을, 서울삼육초등학교 교장 시절에는 ‘아름다운학교경영자 대상’을 수상했다. 공립학교에서 4년, 삼육초등학교에서 42년간 근무하고 은퇴했지만 은퇴 후에도 춘천삼육초등학교에서 4년간 일하며 건축하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말한다.
얼마 있으면 여든을 맞이하는 그에게는, 유치하지만 간절한 소원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내가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싶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감당하며 십자가를 졌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잘 웃고 친절을 베푸는 달란트를 주셨으니 예루살렘 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며 수줍게 전하는 그의 진심이 환한 표정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겨우 그 세 가지 소원만 이뤄 주시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신실한 믿음에 그 어떤 말도 보탤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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